Tuesday, October 7, 2014

카발라...불교와 두 번 만나다...

불교에서...본질적으로 자아라는 것은 없다…
상사라의 미혹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힌두교는..두 토대 위에 세운다…
아트만과 브라흐만…
둘을 어떻게 화해시킬지가 그들의 근본문제이다..
..
유태교는 자아(自我)는 신(神)에 이르는 도구일 뿐이다..
불교가 유태교에게 그런다…
``그치..자아는 없는거지?``
유태교가 불교에게 그런다…
``응… 없다기보다는 사라지지….``
``그게 뭐...신과 하나가 되는 어떤 실재는 적어도 아니야…?``
불교..다시 말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유태교.. 말한다...
``그런가..?``
이렇게..불교와 유태교는 조금씩 양보하려하면...공감이 가능하다...

.......

카발라는 신(神)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조하는 자만 있을 뿐...피조물은 없다….
자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어찌 피조물인가..?
그들이 말하는 창조란..
신의 입장에서는 자기 발현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신의 현존이다...
신의 본질인 에인소ㅍ의 입장에서… 세피로트는 피조물이 아니다…
세피로트는 그저 에인소ㅍ의 변성(變成)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삶속에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어느순간이든...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꿈속에서든..
깨어 활동하는 순간이든..
명상하는 순간이든..
죽는 순간이든..
그부분에 있어...카발라는 견해를 같이 한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같은 맥락에서...모크샤(解脫)를 말한다…
하지만..그들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의 순간은…어느순간보다 유리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반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

카발라는 신(神)을 말한다..
그 들이 말하는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에인소ㅍ와 세피로ㅌ의 두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에인소ㅍ와 세피로ㅌ는 둘 다 신(神)이다…
하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인지의 힘으로 분별할 수 없는 근본실재이고…
하나는 형상이 있고.. 언어로 묘사가 가능한 현상적인 신(神)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그들을 중재해본다면…
에인소ㅍ는 다르마타(法性)이고… 세피로ㅌ는 다르마(法)이다…
한편.. 그들에게는 이 둘은 신(神)이지만…우리 불자에게는 신(身)이다…
에인소ㅍ의 법신(法身)이고.. 세피로ㅌ의 색신(色身)이다…
잘 기억하자..세피로ㅌ는 색신이다...
..
세피로ㅌ은.. 계(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세피로ㅌ는 무색계..색계..욕계라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우주 전체이다..
세피로ㅌ는 우주수(宇宙樹)다..혹은 생명나무이다...
그러므로..세피로 ㅌ는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근원 없이는 자라지 않는다...
우주수인 세피로ㅌ를 관통하는 하늘기둥(天柱)은 수미산이다...
그 주변 위아래로는 욕계에서 무색계까지 스물 여덟개의 하늘(天)이 펼쳐져 있다...
세피로 ㅌ 안에는 무수한 정토가 있으며...무수한 적노백존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없이는...말쿠 ㅌ의 육도환생계로 다르마는 내려오지 않는다...
이처럼 세피로 ㅌ는 담는 그릇인 공간이자...내용물인 적노백존의 지혜이다...
..
세피로 ㅌ의 가장 아래에는 예토가 있고...상사라의 육도 중생이 있다...
세피로ㅌ는 우주적인 마야(幻影)이다...본질이 아니다..
세피로ㅌ는 두 가지 다르마(法)이다...
이 두가지 현상을 내보낸 다르마타(法性)가 아니다..
두가지 다르마란 니ㄹ바나와 상사라이다...
니르바나의 다르마는 본존(本尊)이다...적노백존(寂怒百尊)이다…
상사라의 다르마는 중생이다...여섯갈래의 환생이다...
매우 복잡할 것 같은 세피로ㅌ는 이 두 모습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세피로ㅌ는 부처의 깨달음을 담지는 못한다..
..
세피로ㅌ는 다르마의 길(道)이자 차제(次第)이다...
세피로ㅌ는 선정(禪定)이자 아홉가지 자각의 수준(地)이다...
그것은...욕계의 미혹에 빠진 오취지에서..
무색계의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까지이다..
오직 여기까지다...
그러므로...세피로ㅌ는 부처의 깨달음을 담지는 못한다..
.........

유태교 신비주의는 카발라이다…
그리고..카발라는 토라를 토대로 한다...
그들에게 토라는 경승(經乘)이고…카발라는 속승(續乘)이다...
..
카발라의 소의경전은...조하ㄹ이다…
누가 이것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아주 분분하다...
조하ㄹ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본질은 미드라쉬인 것 같다…
미드라쉬란..유태 경전의 해설(주석)이다..
유태경전의 핵심은...토라를 구성하는 모세오경이며...
카발라는 에인소ㅍ와 세피로ㅌ라는 두가지 맥락에서 유태경전을 해설한다...

그들은 현상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르마인 토라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토라는 다르마를 얘기하는 종이조각이 아니다..
다르마의 현신으로 본다..
속승의 만달라는 그림이 아니라.. 실제 그 세계이자...그 본존이자..그 깨달음이다…
토라의 언어는 마치 그와같다…
그것은 그들에게 본존이다...신의 시현이다...
그래서 카발라를 공부하는 사람은...토라의 길을 따르고....토라와 하나가 된다…
그들에게 토라의 다르마는..수행의 차제이고...깨달음의 내용이다…
속승에서는 이것이 본존이라는 개념으로 변형된 것 뿐이다…

토라에는 4중의 의미가 있다…
페샤트..
데라샤
레메즈
소드..

그것은 속승의 가르침이 지닌 안팍의 네 수준과 같은 것이다…
피상적이고..
내적이고..
비밀하고..
가장 비밀한 네가지 수준 말이다...

카발라는 기본적으로…네번째 형태인...소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속승으로 얘기하면… 가장 비밀하다는 심수(心髓)의 개념이다…
카발라를 공부하는 자는…
가장 외적인 형태에서 출발하여...한겹한겹 안으로 벗겨 들어간다…
외적인 형태 속에 반영되어 있는 깊은 본질과 만나고자 한다..
토라는 카발라의 껍질이다…
카발라는 토라의 심수(心髓)이다
그러나 토라와 카발라에는
중간부분인...자아에 대한…현상에 대한 직관적인 분석이 없다…
그 부분은 미쉬나...미드라쉬..탈무드에서 채워진다…
이것은 일종의 논(論)과 주석(注釋)이다...

……...

에인소프는.. 자기 안에 자기발현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세피라가 나타났다..
이 최초의 세피라에서...나머지 아홉의 세피라(세피로트)가 나타났다…
마야..그 거대한 홀로그램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본질인 에인소프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었다...
..
에인소ㅍ에서 나타난 최초의 세피라는 케테르..라고 한다…
이것은 에인소ㅍ의 정수(精髓)이다...
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시청정의 빈 공간에서 명징한 자각의 태양이 빛나는 이치와 같다…
이 태양의 빛이 비추니…다양한 세피로ㅌ의 홀로그램이 나타난다…
이것을 예쉬라고 한다…
예쉬는.. 말하자면 마야이다…
에인소ㅍ의 본질이 모습을 취하고 나타난 어떤 것…
에인소ㅍ가 에인을 통해서 예쉬로 나타나는 것…이것이...마야(幻影)이다…
환영인 예쉬는 니르바나와 상사라의 두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세피로ㅌ안에는 에인소프의 본질을 감추고 있으며…
보편적으로 이것을 우주수(宇宙樹)..생명나무라 부른다...
알다시피..세피로ㅌ인 이 우주수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있고...
그 위아래로는 다양한 세계(天)이 존재한다....
...
에인소ㅍ는 다르마타(法性)의 청정한 공간이고...
세피로 ㅌ는 다르마(法)라고 하였다..…
토라는 네개의 세피로ㅌ..네개의 다르마를 다룬다….
호ㅋ마.. 비나..티페레ㅌ..말쿠ㅌ..
토라가 다르마라 했던 것은..
토라의 본질이 이 네개의 세피로 ㅌ라는 말이다...
토라는 책이 아니고...
네개의 세피로 ㅌ의 메카니즘이...토라인것이다..
티페레ㅌ는 세키나의 빛을 말쿠ㅌ에 드리우고 있다…
세키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엇이다…
현상 속에 머무는 신의 본질이다….
일체현상 속에 불성(佛性)..신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

카발라는 무아론이다..
그들에게 아트만과 같은 개아는 없다…
오직 브라흐만만이.. 에인소ㅍ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피로 ㅌ는 에인소ㅍ와 다른 어떤 실재가 아니다..
인간도 에인소ㅍ와 다른 어떤 실재가 아니다..
그들에게 세피로ㅌ와 인간은 에인소ㅍ의 변성이지...어떤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상을 따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인간은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처럼 투영된 것이다...
거대 인간인 세피로ㅌ(아담카드몬)도 그렇고...인간(아담)도 그렇다…
그러므로..이 두 아담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무아(人無我)이고.. 법무아(法無我)이다...
아담은...에인소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실재가 아니므로..인무아(人無我)이다..
세피로ㅌ(아담카드몬)는 에인소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실재가 아니므로...법무아(法無我)이다...
한편 그들은...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끌어낸다고 한다…
본질에 있어서 모든 것은 에인소 ㅍ이므로....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들의 말을 따르자면.. 중생은 여래장이다…
본디부터 여래의 본질을 갖추고있기에 그것이 드러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토라와 카발라의 이상은 같다..
그것은 신두(神頭)로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둘은 견해가 다르고... 방편이 다르다…


토라는 마음의 길이다…
마음의 메카니즘이 적용된다…
목표는 저기에 있고..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처럼...3 무량겁이 걸려야 그 길의 끝에 도달할 것이다..
..
그러나 카발라는 릭빠의 길이다…
사념을 초월하여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나아갈 곳이 없다..가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카발라는 본성의 길이다…
….


그들은 귀의(歸依)를 한다..
그리고 계율(戒律)을 받으며..신을 명상(禪定)한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신두는 토라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토라가 그들의 길이다..
불자들이…다르마의 외적인 형태인...경전을 길로 삼는 이치와 같다….
..
카발라는 토라를 바탕으로 한다...
토라의 바탕없이 카발라를 명상하려는 자는…공중누각을 지으려는 자와 같다...
그러므로...카발라는 토라의 기반에 의지한다…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구든..카발라를 공부하려는 자는…먼저 토라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토라에서 히브리 문자는 중요하다…
그 문자는 신에 이르는 가교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자와 상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토라의 기초이다…
이 기초는 카발라를 명상하는 기초이기도 하다…
그것은 힌두철학이나 불교철학에서 산스끄리뜨어가 가진 가치와 같다…
그들에게 문자는…단순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다르마인 세피로ㅌ이고…종자음이고... 만달라이다..
그 안에 깃든 1백의 적노존이다…



그들의 목적은 둘이다…


첫번째..
다르마..혹은 본존(本尊)인 세피로ㅌ와 하나로 공명하는 것…


두번째...
본존인 세피로ㅌ를 그것이 비롯된 다르마타(法性)….즉 에인소ㅍ로 되돌리는 것…
이로서...두가지 색신과 법신이 무분별의 하나로 나타나는 자성신이 실현된다…
그리하여...신두(神頭)...궁극적인 보리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인 보리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바탕에...세피로ㅌ에 에인소ㅍ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에인소ㅍ가 세피로ㅌ를 낳았다고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대상의 창조가 아니기 때문에 피조물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시현하는 것이 어찌 피조물인가..?
토라와 카발라는 조물주와 피조물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불교처럼 불이(不二)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힌두철학은...토대에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다…
그러므로…
불교와 카발라는 다소 가깝고…
불교와 힌두철학은 다소 멀다…
.....

이제는 카발라를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기로 하자...
..
미륵오론에..법법성분별론(法法性分別論)이라는게 있다…
다르마(法)와 다르마타(法性)를 릭빠의 눈으로 직관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세피로ㅌ와 에인소ㅍ의 두 측면을 직관하는 것이다...
카발라는 이렇게... 법과 법성을 직관하려한다….
물론 불교에서도…
수행의 차제를 통한 점수를 하지않고…이 둘을 직관해내려 한다..
마하무드라나 족첸이 그러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누구나 처음부터 근기가 좋아서...족첸을 수행하던가…?
연기의 작용으로...까르마를 따라 자량을 쌓다보니…근력이 생기고...
법과 법성을 한꺼번에 분별해낼수 있는 힘도 생기는 거 아닌가…?
사정이 그러하므로…불교는 일부러 징검돌을 놓아준다…
이것이 불교의 큰 특징이다..
대승의 지관(止觀)을...마하무드라(大手印)에 이어주고…
혹은 마하 아누의 생기차제 원만차제를 족첸에 이어준다….
이것은 고무적이고 효과적이다…
….
그런데 카발라는 다리를 거의 놓지 않는다…
그냥...다르마타(에인소ㅍ)에 이르란다…
아주아주아주 수승한 자는 그렇게 할 수도 있으리라…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건너갈 수 있는 방편의 다리를 잘 놓아주지 않는 것...이것이 카발라의 맹점이다…
기억하자...
불교와 카발라의 차이는 방편의 기술에 있다는 것을....
불교로 전향을 하는 카발라 학자들이...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

70년대 초반부터..
카발라를 공부하던 유태인들이 상당수 불교로 전향을 하였다…
그 때 그들이 본 것은 이것이었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카발라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불교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수승한 방편과 살아있는 전승이었다...
..
둘이 가진 유사성으로 인해...
불교는 카발라 학자들의 마음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다르마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그것을 적용하고 성취하는 방편은.. 불교가 월등하였다…
보다 다채롭고..섬세하고..수승하였다..
불교가 방편이 수승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카발라가 지나치게 방편이 부족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지적하고 느끼는 가장 심각한 부분이었다...
..
두번째는...카발라는 그것을 전수해 줄 스승이 현실적으로 없다는 것이었다...
카발라에 평생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는 진지한 열정을 가진 일반사람들과 랍비들이 포함되어있다...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에게 물었다..
이것은 지난날...나자신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을 한다...
카발라는 오늘날에도 쓸모가 있는가..?
유태 신비주의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어느 곳에도 카발라의 스승이나 전승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어느누구도..랍비들도...그 사실을 모른다...
..
한번은...어느 카발라 학자가 카발라에 정통했다고 믿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
에인 소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답은 않고..한참을 그를 쳐다보더니..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에인소ㅍ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어떤 전승이 있다는 말 들어봤는가..?``
``에인소ㅍ에 관한 이해를 끌어내 줄 수 있는 방편..
에인소ㅍ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을 누가 가지고 있다는 말 들어봤는가..?``
``그와 같은 구전을 전수 해 줄 당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지금 말한 것들이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는가..?``
...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그들을 불교로 돌아서게 하였다...

지금...
유태인의 상당수가 불교를 공부한다...
전체의 30%가 넘는 것으로 안다...
서양의 어떤 다른 민족보다 10배나 많은 수치이다...
워낙 보수적이고...자기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자들도 그들이고...
서양의 불교를 선도한 것도 그들이다..
그들은 항상 선봉에 서있었고…
린포체들의 최측근들이 되어...
서양 불교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풀무처럼 서양정신을 타오르게 했다…
그 현상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고...
서양 정신의 새로운 변형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티벳불교가 서양에서 지금의 아우라를 지닌것은..모두 그들 덕분이다..

유태인이면서...불자가 된 사람들을 JUBU라고 한다...
유태불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단순한 유태인이 아니라...카발라를 공부하는 집단들이었다...
그리고 카발라가 안고있는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고민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불교로 전향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발등의 불이 아니니까...!!
..
아마존은 내가 책을 사러가는 인터넷 서점이다...
나는 거기에서 족첸에 관한 놀라운 서평을 남기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카발라와 족첸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추천해 준 족첸 서적들은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었으며....
특히 그는 롱첸랍잠의 7보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JUBU... 유태불자 중 한 사람이었다...
.....

이러한 현상은 처음이 아니었다...
역사상 두번 있었던 일이다...
..
한번은 2천년전이었다...
여기에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예수 이전에...
유태교는 불교와 만나..엣세네라는 새로운 전승을 일으켰다...
예수는 그 환경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다...
그들은 시나고그 같은 전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넝마를 입고 들판에 있었다...
승려가 아니라...떠도는 요기와 같은 삶이었다...
후일에...예수의 가르침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수많은 종파를 일으켰다...
그때...그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한 것은 그노시스였고...
가장 세속적이고 거리가 먼것은..지금 카톨릭의 전신이었다...
로마가...세속적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카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이자...
나머지 전승들에 대한 거센 박해가 시작되었다...
뿌리까지 말려버렸으므로 ..다른 것들은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예수의 가르침의 진의는 사라져버렸고...
게다가...로마는 성경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강도높게 가위질하였다...
카톨릭을 개혁하니 개혁한자는 신교가 되었고...카톨릭은 구교가 되었다...
이게 유태교 한 전승의 역사이자 기독교의 역사이다...
....

이러한 사연으로...
유태교와 기독교는 지구의 두 극처럼 벌어져 있다...
다름에서 생기는 어색함을...서로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다…
한부모에서 태어난 둘이지만...동생이 강도높은 성형을 한 탓이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불편해한다…
안좋은 경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메카니즘이...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둘 사이에 노골적인 거부감으로 나타났다…
기독교는...이렇게 된 것이 유태교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유태교는.. 기독교가 근본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노시스가 살아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서양의 정신문화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되어있을 것이다...
유태교와도...힌두교와도...불교하고도 그다지 불편한 사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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