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3, 2014

진아..브라흐만..창조.


무아...진아..

무아는 공성에 위배되지않고..
공성은 여래장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해 세가지 법륜으로...세가지 견해를 말씀하셨다...
초전법륜의 무아,,이전법륜의 공성..삼전법륜의 여래장...
진실을 보는 눈의 깊이는 다를지라도...분명 같은 것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힌두의 진아는 무아도 아니고 공성도 아니고..여래장도 아니다..
다른 개념이다...
무아와 공성과 여래장의 개념에  접근하려했던 개념이 있다...
그것은 브라흐만이다...
그러나 진아...아트만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진아는 무아이거나 여래장일수 없다..
알라야(아뢰야식)의 의미를 가지고...뒤로  물러나야 한다...
진아를 불성이나 여래장의 의미로 보면... 커다란 패착이다...
....

우파니샤드를 직관하고.. 불교를 수용하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9세기경에 만들어졌다...
상카라는..
인도불교가 티벳으로 거너가고...
빠드마삼바바께서 티벳으로 건너가던 당시에 살았다...
빠드마삼바바가 티벳에서 내속승을 가르칠 때...
그는 아드바이타베단타를 가지고...세상으로 나아갔다...

아드바이타베단타가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다른 힌두철학들이.. 힌두를 가장한 불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같은 어미의 배에서 나왔는데..근본이 다른것처럼 여겨졌다..
다른 종교들은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힌두의 정체성은 위협받고...
아닌게 아니라..
외부세력들을 향한.. 힌두의 자존심을 건 투쟁에서..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우파니샤드를 직관하고..불교의 중관과 유가행의 가르침을 수용했다...
불교는 베다에서 비롯되지않았으니...
6파철학과는 뿌리에서 다르다...
아드바이타베단타가 불교적인 향기를 발산하자..
힌두철학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난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불교는 그만큼..뿌리가 다른 것이었다...
베다의 자식들은...아드바이타베단타를 영토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였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힌두철학을 가장한 불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드바이타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아트만과 브라흐만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브라흐만은...니르구나 브라흐만이다...
브라흐만의 본질은 언설로 지적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실존Sat...의식Cit..지복Ananda이다...
다른말로 하면...원시청정의 공성..명징한 자각..편만한 자비이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세가지 토대가 있다...
브라흐마수뜨라.. 우파니샤드..바가바드기타가 그것이다..
아드바이타베단타를 따르는자들은 이것을 공부한다...
수용하는 자세로 받아들인다면...하나 더 있다...
대승불교의 중관과 유가행이다....
이 네가지가 아드바이타베단타를 만들었다...

그는 6파철학을 논파하고...베단타의 오류를 개선하였다...
아드바이타의 개념은 그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이미 베단타 안에 있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베단타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모순을 타개해나갔다...
아드바이타베단타의 토대를 마련해준자는 상카라의 스승의 스승이었다...
상카라의 스승은 그의 비범함을 보고 아드바이타베단타를 맡긴다..
``내가 이것을 줄터이니...너의 입심을 발휘해라...``
그는 마치..잠양켄쩨왕뽀의 생각을 언어로 정리한 잠괸꽁뛸로되타예 같았다...
상카라는 문장을 해득하고...정리하고..주석을 다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용어가 기존의 힌두용어이니...베꼈다는 증거는 보이지않는다..
심증은 있는데..물증이 없다고 할수 있다...
적어도 아드바이타베단타는 불교는 아니다..
불교를 부분수용한 힌두철학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

둘은 분명히 다르다...

힌두의 본질과 불교의 본질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힌두인들이 말하는 본질과 불교인들이 말하는 본질사이에..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지..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말할수 있는자는 적다...

불교의 모든 전승은...부처님의 세가지 교설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서로 근본이 대립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바탕과 밑그림은 하나로 하고..저마다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하는 것이다...
붓다다르마는 경승과 속승이 대립되지 않는다..
속승은 부처님의 삼전법륜을 바탕으로 기술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닝마의 9부승은 아홉가지로 갈라지지만... 서로 근본적으로 대립되지는 않는다..

중관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관은 깊은 의도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자립논증..귀류논증...
둘은 관점의 차이가 있으며.. 수행에 영향을 미친다..
수행의 차제와도 관련되어있다..
어느 하나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
차이가 있고...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티벳은 귀류논증을 수용하였다...
그리고..다른 필요성과 의도가 여기에 개입되었다...
귀류논증이..자공설과 타공설로 나뉘어진 것이다..
귀류논증 타공설은...붓다다르마의 최상의 견해에 맞닿아 있다...
타공설은...유가행의 미륵오론이나.. 족첸의 견해와 비교할 수 있다...
중관의 포괄적인 의미는 부처님의 이전법륜이다..
공성의 이치를 논한다...
중관이 말하는 공성의 이치는 수준에따라 미세하게 갈라진다...
중관과 유가행과 족첸사이에도 작은 차이가 발견된다...
여러분은 이 차이를 분간하고 수승함에 따라 순위를 정할수 있다고 보는가..?
이것을 분간할수있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이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를 논하는 이유는  무얼까..?
수행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를 치열하게 논하는 집단들이....
아드바이타베단타와 중관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어떤 분야의 장인들은 미세한 차이를 본다..
미세한 차이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안다...
개당귀와 참당귀는 정말 비슷하다..
둘을 구분하는 것은.. 약초를 캐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개당귀는 조금만 잘못먹어도 거품물고 쓰러지는 독초이지만...
참당귀는 매우 유익한 약초이기 때문이다...
나는 약초의 달인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1백가지도 넘는 참당귀를 구분하였다...
어떤 것은...설탕만큼이나 단 당귀가 있었다...
그 당귀는 오래된 산삼보다 훨씬 희귀하다고 한다...
약초꾼은 개당귀와 참당귀를 한 눈에 알아본다..
건성으로 보아도 안다..
...............

갈등이 먼저 해소되어야 한다...

다르마의 입장에서...6파철학의 갈등이란 불교처럼 미세한 부분이 아니다...
근본 프레임자체가 어긋나있는듯이 보인다...
같은 베단타안에서도...분파간에 차별이 심하다...
정체성을 논하는데...자체대립이라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베다의 정체성이 확립되려면..
그로부터 나온 모든 철학이 개념적으로 같은 토대를 이루어야 한다...
모든 힌두철학이 자체 모순을 극복하고...근본적으로 같은 토대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불교와 정체성을 논해야 할것이다..
사실 이 문제가 존재하는 한...
아드바이타베단타가 불교철학과 비교가능하다하더라도...
서로 대화를 나눌 자격이 생기질 않는다...

부분만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체성이란.. 부분만가지고 논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에 지적했던 것처럼...
힌두철학은 대부분 극심한 모순투성이인데다가...
화해할수 없을만큼 서로 크게 다르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썩은 사과의  보기좋은 부분과 같다..
보기 좋은 부분을 내보이면서...정체성을 논할수는 없다...
썩은 것이 정체성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지않는가..?
아드바이타베단타의 가치는...힌두철학에서 가장 높은 가르침이라는 것에 있지 않다...
힌두철학의 극심한 갈등을 어느정도 해소하고...
전체를 결속할 수 있는 끈을 마련했다는 것에 있다..
그 시도는 어느정도까지는 성공한듯이 보인다...
........

불이일원론...

가우다파다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의 토대를 세웠다.....
그는 상카라의 스승의 스승이었고..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힌두철학와 불교철학의 두 세계를 연결하였다..
그렇지만 차이도 있었다...
아트만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대신 연기법(緣起法)은 포기하였다...
불교는 연기법에 따르지만...가우다빠다는 실재를 직관하는 방법을 썼다...
그말은... 지혜를 강조하고.. 방편은 결여되어있다는 뜻이다,..
6조 혜능 이후의 선()이 그러한것처럼 말이다...
아드바이타베단타의 수행은 그처럼 지혜에 편중되어 있다...
방법의 핵심이...중관...마하무드라.. 족첸의 심식부와 닮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혹은 족첸의 떽최(공성)를 수행하지만.. 퇴갤은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베단타의 문제는 뭘까..?
견성은 있지만..성불은 없다는 뜻이다...
법신은 체득하지만... 두가지 색신을 얻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결국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중국의 선()처럼 성불의 가능성이 사라진 셈이다...

지혜와 방편의 포괄적 운용...
불교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그 위대함은 주로 속승에 나타난다...
색신을 성취하는 방편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법신을 체득한자라도... 미숙한 홍광신은 이룰 수 있다...
수승한 홍광신이나 광명신은 이루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

공성을 논하지만 공성이 아니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공성을 논한다...
그러나 아드바이타베단타와 중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건성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드바이타베단타가..공성의 이치를 논한다 하지만...
근본에서 진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공성의 견해는 무아의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
그들이 말하는 아드바이타(不二)라는 것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불이(不二)이다..
공성의 입장에서..하나 혹은 전부는 공성이 아니다...
궁극적인 하나인 아트만도..아트만의 무한집합인 브라흐만도 공성의 이치에서 벗어난다..
둘이 결합하여 하나가된다는 것도 공성의 이치에서 벗어난다..
아드바이타라 말하지만.. 아드바이타가 아니다...
기본이 마련되어있지않으므로.. 논할수 있는 바탕이 없다..
그러므로...아드바이타베단타가
중관의 타공설이나 유가행의 법법성분별론... 족첸의 견해와 논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베다는 아트만을 버려야 한다..

베단타에서..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두 극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대비되고있다...
이러한 관계의 대비성이...브라흐만의 의미에 악영향을 미친다...
베단타에 의하면...아트만은 원자크기만한 극소분자이다..
아트만은.. 무명을 버리면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며..
영원히 브라흐만을 구성하는 한부분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트만이라는 하나의 입자가 무수하게 집합한것이 브라흐만이라는 개념이다...
공성이란...하나인것도 아니고... 모든것을 합친 전체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트만도 공성에 부합하지않고... 브라흐만도 공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이거나 전부인것은 마야로서만 연기(緣起)적으로 나타날뿐이다..
아드바이타베단타의 진아나 브라흐만은... 마야로서만 존재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중관과 논쟁이 불가하다...
중관과 논쟁할수 있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
..................

혹은..아트만은 알라야여야 한다...

아트만(진아)의 의미가 알라야(아뢰야식)라면..
힌두철학이 안고있는 거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아트만이... 알라야의 개념이라면...
연기적으로만 나타나고...
공성으로서의 브라흐만의 본질에 그림자를 잠시 드리울뿐이기에...
본래 완전한 브라흐만(공성)의 개념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자아로서의 알라야는 윤회의 주체이고 연기(緣起)의 뿌리이다...
그것은 경험을 저장하고..
개별적인 인격을 형성하며...
가장 보편적인 언어.. 영혼의 의미와 유사하다...
알라야...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연기(緣起)적으로만 나타난다...
브라흐만의 입장에서  보면... 알라야는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어떤 것도 개체나 전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성의 견해에 굳건히 서고..
아트만을 알라야로보면 된다고하였으나...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나타난다...
6파철학..혹은 아드바이타베단타는 불교가 되버리기 때문이다...
힌두의 정체성이 일시에 무너지는 셈이다...

상카라가 완전한 다르마를 세우지 못한것은..
버려야 할 개념...아트만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리지 못한것이 아니라... 버리지 않은 것이리라...
힌두의 영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아트만을 지키고... 다르마는 버렸다..
힌두를 지극히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종주국..인도가 바로 서는 날이 오려면...
삼세 부처의 완전한 다르마를 세우려면...
과거의 유물인 베다를 버려야 할 것이다...
과격하지만 완전한 처방이다...
..................

세상은 브라흐만이 창조하였을까..?

자신이 자신안에 자신을 창조했다는 의미라면...창조가 맞다...
브라흐만은 자기안에.. 자기환영적인 거대한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피조물은 없다...
일종의 자기연출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만 안에 브라흐만의 그림자가 던져졌다..
그것을 마야라 한다...
마야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야다...
마야를 창조했으니.. 실제로는 창조한 것이 없다..
마야라는 것은 실존이 아니니...
이 창조는 창조된 대상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자기내포적이다...
자기내포적이라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창조물은 이원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둘이 아니다...
하지만....
브라흐만이.. 브라흐만 자신이 아닌 다른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의미였다면...
이 세상은 창조된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브라흐만은...자기안에 홀로그램과 같은 자기를 창조하고...
나타난 브라흐만은 연기적인 착시로서 존재한다...
베단타가 불이일원론이 맞다면..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아트만을 연기로서 바라보지 않으면... 불이일원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트만을 윤회의 주체인 알라야(아뢰야식)으로 보지않는다면...
근본적인 모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것이 베다에 기반한 모든 철학이 가진 원초적 문제이다...
모든 힌두철학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두개의 본질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다르마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


진아와 브라흐만의 합일

불교에서 자아와 공성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되돌아갈 것도.. 결합할 것도 없다...
어떤 부분적인 자아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공설의 입장에서 보면... 정광명을 이야기하지만...그것은 자아가 아니다...
깨달은 부처라하더라도.. 그 자신을 의미하는 자아는 없다...
힌두철학에서 진아와 브라흐만은 동일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결국.. 진아는 없다..
그러므로 합일도 없다...
무명이 벗겨지면... 합일한다고 생각하는 진아는 찾아봐도 없다...
인지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자도 없고.. 인지의 대상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브라흐만이다..
본래부터
브라흐만의 본질은...
무시이래  모든 중생의 본질이고..
그것을 자각하는 성문..연각.. 보살.. 금강살타..비드야다라의 본질이고..
궁극적인 경지...부처의 본질이다...
무아는..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뜻이다...
공성은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뜻이다...
원시청정의 하늘에는 하나로서의 아트만이 없다...
무한소가 없으므로...무한소의 거대집합으로서의 브라흐만도 없다..
여래장은..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뜻이다...
명징한 자각은.. 원시청정의 하늘을 꽉채우지만...
무한소의 아트만도 아니고 무한대 집합으로서의 브라흐만도 아니다...
여래장에는 진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진아(아트만)가 없으니 합일하는 자도 없고... 해탈(지반묵티)도 없다..
연기로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마야일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이일원론이다...
아드바이타베단타가 끝내 불이일원론이 되지못하는 것은...
아트만을 놓지 않은 채.. 브라흐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라다크리슈난은..
아드바이타베단타를 가지고..불교의 초전법륜과 비교를 하였다...
정당한것은 아니지않은가..?
어느산이 더 높은가를 따지는데..
이 산 산꼭대기와 저 산 구릉을 비교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남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라다크리슈난은 자기무지를 심각히 드러냈으며...
그로인해...자신의 가치를 손상시킨 것이다...
학자의 무지는 대중들에게도 끼치는 영향이 크다...
그것은 어찌 책임질 것인가..?
...............

아드바이타베단타..서양의 지지를 얻다..

라마나마하리시...라마크리슈나..비베카난다는..
아드바이타베단타의 후예들이다...
그들의 영향으로...서구 정신세계에 아드바이타베단타의 불이일원론이 알려졌다..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진사람들에게는...
힌두의 영향을 받은 아드바이타베단타가 중관이나..족첸보다는 입맛에 맞았을 것이다...
서양인들에게..친근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고싶은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입맛에 맞으면..우호적인 입장이 되고...다른쪽에 대해서는 배타적일수가 있다...
아드바이타베단타는 서양의 정신적인 흐름을 일으킨다...
아드바이타는...새로운 신비주의의 토양이 되고...뉴에이지 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새로운 신비주의의 옷을 벗겨보면...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드러난다...
그리고...가치에 목마른 젊은 한국인의 정신은..
화석화된 한국불교에 등을 돌리고...
서양인의 옷을 입은 아드바이타베단타나 티벳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아드바이타베단타에 좀 더 우호적인 평가를 보게 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학자들의 이러한 편향적인 평가들을 아무 검증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

힌두철학의 산 정상에는 베단타가 있다...
베단타는 베다가 쓴 승리의 월계관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 그에게 불교가 말한다...
``알다시피...내가 니 에미다..
너는 네 스스로 존재할수없어...
정체성을 얻기 위해...
나를 모방하고...
나를 닮은 것으로서 내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더냐..!``

티벳의 토속종교인 뵌교에게 불교는 말한다...
``알다시피...내가 니 에미다..
너는 네 스스로 존재할수없어...
정체성을 얻기 위해...
나를 모방하고...
나를 닮은 것으로서 내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더냐..!``

신지학에서 시작하여 연이어 나타난 새로운 신비주의에게 불교는 말한다...
``알다시피...내가 니 에미다..
너는 네 스스로 존재할수 없어...
정체성을 얻기 위해...
나를 모방하고...
나를 닮은 것으로서 내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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