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21, 2014

롱첸빠가 부탄으로 간 까닭은..?

닝마전승은 근세까지 티벳의 역사에서 정치에 가담한 적이 없다...

권력의 출발점인  큰 사원을 건립한 적이 없고..
자신의 존재를 크게 홍보한 적이 없고...
대중적인 지지세력을 확보한 적이 없고...
다른 전승의 권력을 탐하거나 추격한 적이 없고.. 빼앗은 적이 없다...
아무리 뛰어난 성취자라도..
정처없이 떠도는 거지의 모습을 하고있거나...야생동물처럼..동굴에서 살 뿐이었다...
닝마가 처음 조직적인 형태를 띤것은...17세기말~18세기 초였다...
5대 달라이라마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닝마의 법왕을 세우게 된것은...20세기 후반이었다..
14대 달라이라마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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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첸빠는..
평생을 홀로 명상수행한 자다...
그는 일체 다르마에 통달하였고,,,
더러는.. 우주전체를 직관하는 책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권력을 탐한 적은 없다..
그의 삶을 본다면...권력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그는 권력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리고.. 쫓기는 입장이 되어 부탄의 깊은 계곡으로 은둔하였다...
그를 쫓은 자는 따이 씨뚜였다...
심심해서 쫓은 것이 아니고..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기 위해서였다...
따이 씨뚜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자신의 적대세력에 속한 자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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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이 시뚜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되었고...
거칠 게 없었고...
승승장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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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권력의 역사를 잠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롱첸빠께서 부탄으로 간 까닭은...
티벳불교 전승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권력의 문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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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귀는 중원의 첫주인이었다...
정치권력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승원(僧院)이 발달함에 따라...
규범이 발달함에따라...
전승자들이 가사를 걸침에 따라...
나로빠와 밀라레빠의 정신적 고귀함은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원동력은 대중적인 승원에 있지않고...설산의 동굴에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된다는 것은 세력을 키우고...
세력은 권력이 되고...정치적 주권을 남용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티벳의 정신이 쇠락한 이유이다...
아마도..빠드마삼바바께서 역사를 통한 전승을 포기하고..가르침을 숨기셨던 것은 이 부분때문일 것이다..
빠드마삼바바께서는 제자들더러 역사의 배후로 숨으라고 하셨다...
동굴에서 나아가지 말고...형태를 갖추지말라 하셨다...
나는 그의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대중적 지지기반은 약하지만..
권력을 탐한 적이 없고..
다르마 아닌것에 물든 적이 없고..
최상의 견해를 보존한 닝마...
그것이 내가 닝마전승을 선택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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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빠드마삼바바의 행보와는 달리...
티벳에는 수많은 싸르마 전승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싸르마는... 신역전승(新譯傳承)이다...
닝마는 구역전승(舊譯傳承)이다...
닝마는 자신을 닝마라 부른적이 없지만...
소위 신역전승라 일컫는 싸르마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자신들과 구별하기 위해...빠드마삼바바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닝마라 부르게 되었다...
싸르마 전승의 선두주자는 마ㄹ빠 까귀였다...
마ㄹ빠 까귀는 거사..마ㄹ빠가 세운 전승이었다...
그는 나로빠와 마이뜨리빠로부터 배워서.. .
밀라레빠에게 전해주었고..
밀라레빠는 마ㄹ빠 까귀의 강력한 모델이 되었다...
그 후로 마ㄹ빠 까귀는 여러가지로 나뉘어지면서...
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는 대중 속에서 세력을 키워나갔지만...
일부는 성산에 있는 동굴에서 정신적 가치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마ㄹ빠로부터 시작된 까귀의 영향력은 17세기까지는 이어진것 같다...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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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사꺄전승은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사꺄의 이름은... 사꺄 빤디따에 이르러 눈부시게 빛나게 되었다...
그 덕택으로... 사꺄전승은 세력을 얻고.. 설원에서 정치적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의 배후에는 징기스칸이 있었다...
그때...몽고는 중앙 아시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꺄 빤디따와 그의 법손이 꾸빌라이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정신적 우월함으로..몽고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리고 말았다...
몽고는 티벳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스승의 전승인 사꺄전승을 옹호하고 지지하였다...
그렇게 사꺄는 티벳의 권력을 쥐게되었다...
그러나 사꺄의 집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 중반까지.. 불과 1세기 동안이었다...
사꺄전승의 권력은 얄룽짱뽀에서 팍모두파 왕조가 출세함에따라 급격하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권력이 다시 까귀전승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짱지방에서... 중부티벳으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다..

까귀의 큰 가지인 팍모두파에서 다시 작은 가지를 친 따이시뚜의 법맥은...  
이처럼 정치적 권력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권력은 팍모두파 왕권을 확립하고... 사꺄를 강력하게 밀어냈다...
그 와중에...닝마의 롱첸빠는 적대세력으로 몰려.. 따이시뚜에게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다...
롱첸빠는 티벳중부 라싸 곁에 있는 예ㄹ빠를 재건하고...라싸에 마니사원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계획을 보류하고...부탄의 붐탕계곡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롱첸빠는 히말라야를 넘어...깊은 산악국가 부탄으로 은둔을 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10년을 머물렀고...
이 때.. 롱첸빠는 부탄에 여덟개의 암자를 세웠다고 한다...
그 중...몇개가 붐탕지방에 있는 것으로 안다...
타ㄹ빠링은 그 중 하나라고 한다...
그가 머물렀던 곳에는 의미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는 처음.. 쌈링이라는 마을에 머물렀다...
쌈링마을 위에 있는 최닥사원은...구루린포체의 명상동굴이 있는 곳이다...
최닥사원 위에는 롱첸빠의 명상동굴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롱첸 숙티라는 바위가 놓여있다...
롱첸빠는 그곳에 앉아..7보장의 나머지 절반가량을 써내려갔다...
그런 의미에서...롱첸 숙티는 티벳의 강리 뙤까르에 비교할 수 있다...
롱첸빠는 구술을 하고...
다쑹 사 라훌라는 기록을 하고...
호법신 에까자띠는 잉크를 준비하고...
바즈라싸두는 종이를 준비했다 한다...
이렇게 넷은 이 바위 위에 앉아...
붓다 다르마의 궁극적인 저작인 7보장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부탄에서 롱첸빠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장소라 할 수 있다...
.....................

그는 부탄여자 끼빨라를 만나 딸과 아들을 낳았고...그 아들은 롱첸빠의 법통을 이었다...
나중에 따이 시뚜는 롱첸빠의 마음을 알았다...
롱첸빠는 자신의 적으로 나설만한 인물이 아니고...나선적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롱첸빠의 각성과 지식에 감화되어...롱첸빠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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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까귀로 거의 넘어갔지만...15세기 중반까지...사꺄와 까귀의 두 권력은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둘의 싸움은 격렬했고...
수많은 사원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권력을 움켜쥐려는  유혹적인 충동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이 때 쫑카빠라는 민들레가 이 틈바귀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대중적인 승원의 체제를 만들었고...
두 세력의 틈바귀속에서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쫑카빠의 홀씨는 먼나라에까지 날아갔고..
보수적인 다르마로서 설득력을 가지고..커다란 지지의 영토를 구축하였다...
그 다르마의 이름은 겔룩이었다...
까담도..까귀도..사꺄도...겔룩이란 이름 속으로 점차 흡수되고있었다...
겔룩이 정치적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집권세력에 대한 강한 심리적 반발때문이었으리라...
갈등과 고통이 많으면...사람들은 변화를 꿈꾼다...
그러한 변화에 대한 요구가 겔룩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중앙집권적인 승원체제는 겔룩을 급속도로 비대하게 키워나갔다...
사꺄를 보듬었던 몽고의 마음은 겔룩으로 기울었고...
몽고의 알딴 칸은 소남 갸쪼를 3대 달라이라마로 추대하여.. 정치적 권력의 중심에 세웠다..
그리고 기존의 정치질서와 구분하기 위해...황모를 쓰게 하였다...
팍모두파 왕조의 권력은 1세기만에 겔룩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해서 얄룽에 세워진 권력은 다시 시가쩨로 이동하였다...
권력을 쥐자..겔룩은 라싸로 입성한다...
그때가 16세기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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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기존의 홍모와 새로 등장한 황모 사이에 대립각이 커지게 되었다...
까ㄹ마까귀를 지지한 짱 왕조는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겔룩을 질투하였고...군대를 키우게 되었다...
까ㄹ마까귀는 역성혁명을 허락하고 가담하였다...
까ㄹ마까귀의 역모는 실패하였다...
몽고의 구시리 칸을 등에 업은 겔룩은...까ㄹ마까귀를 거세게 후려쳤다...
결국..까ㄹ마까귀의 지지세력이었던 짱의 군대는 패퇴하고...
짱의 왕은 처형되었고...
까 ㄹ마까귀의 본산인 출푸사원은 봉쇄되고...승려의 시체는 산이 되었다...
동부에 있는 캄지방에서 서부 라다크에 이르기까지 까귀청소가 시작되었다...
10대 까ㄹ마빠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탄으로 바람처럼 달아났다... 
그 때 다치지 않은 것은.. 부탄에 있는 둑빠까귀뿐이었다...
그때 이후로 까귀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버렸다...
그때가 17세기 중반이다...
이렇게 권력의 유혹에 빠진 까귀의 영화는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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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대달라이라마가 세상을 떠나자...
겔룩의 영화도 풀잎의 이슬처럼 별안간 말라버렸다...
18세기초에...몽고와 중국의 연합군이 라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승원은 불타고...6대 달라이라마는 살해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개입과 통제가 시작되었다...
7대 달라이라마가 잠시 자리에 앉은 이후로...
8대에서 12대까지의 달라이라마 환생자는 모두 발견되자마자 살해된 것으로 안다...
등극해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후반까지 말이다...
티벳에 어두운 그림자가 깊숙히 드리워졌다...
티벳불교의 대부분의 전승은 끊어지거나...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티벳의 정체성 자체가 위협받았다...
이렇게 티벳고원에 타락과 비극과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
티벳동부 캄지방에서.. 티벳불교를 각성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1천년동안 감추어진 빠드마삼바바의 각성이 족첸의 닝틱전승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고..
전승을 초월한 초종파의 기운이 티벳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천년만에 핀다는 우둠바라 꽃과 같았다...
혹은 1천년만에 꺼내는 타임캡슐과 같았다...
다시 20세기 중반에 티벳은 비극을 맞이하였고... 
중국 공산당에의해 질그릇처럼 산산히 쪼개져 세상으로 흩어졌다...
부정적인면과 긍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잘못 꺼낸것일까..?
아니다...
적절한 시점이 아니었다면 꺼내지 않았을 것이고,,,
다시 꺼낸이상...시공의 어둠에 의해 다르마가 유린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21세기인 지금.. 부탄에는 롱첸빠가 꽂은 지팡이가 잘 자라고 있고...
나처럼.. 롱첸빠에게 미쳐서 영혼까지 팔아먹는 사람들이 지구를 덮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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