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4, 2015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기--1편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존재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게 아니다..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남을 지적하는 근본게송--


이 가르침은 로종(修心)이라 알려진 범주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보살 만주스리(文殊菩薩)께서 사꺄파의 대스승, 싸첸 꿍가 닝뽀에게 직접 전해주신 것입니다..
싸첸 꿍가 닝뽀는 싸꺄 전승의 5조(五祖) 중 첫번째 분입니다..
그 분은 이 가르침을 살펴보시고는..
이 네 구절이 경승(經乘)의 심오한 가르침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근본스승이신 ~ㅇ오르 사원의 담빠 도르제창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이 가르침을.. 고명하신 최제 띠첸 린포체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은.. 심요(心要)라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유형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르침은..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경(經),론(論)과 같은 광대하고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철저히 공부한 다음 천천히 수행으로 옮기게 됩니다..
두번째는 폭넓고 자세한 공부를 위해 시간을 들이지 않는 자들을 위한 핵심 가르침((心要)입니다..
이것은 큰 깨달음을 얻으신 대스승께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간결하게 수행의 지침을 제공하는 심요(心要)를 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그것을 곧장 수행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모든 싸꺄사원에서는 이 가르침이 예비수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만주스리께서 직접 전수하신 아주 권위가 있고 의미가 깊은 심요(心要)이기 때문에…
티벳불교 전승 전체에서 깊은 가르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종(修心) 가르침의 하나로 포함되어있기도 합니다..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이 명상을 수행하기 위해.. 외적인 소란이 없는 장소에 앉아..
분주한 사념과 같은 내적인 산란을 피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가부좌로 앉아.. 귀의문을 염송하고..보리심을 일으킨 다음..
이 가르침의 첫 게송을 새겨보기로 합시다…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이 첫 게송이 지닌 보편적인 내용은.. 소승, 대승, 금강승에 모두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첫 게송은 다르마(法)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과 바르지 못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다르마 수행, 청정한 다르마 수행은.. 이 생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은..진정한 다르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세속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모래가 물로 보이는 신기루처럼..목마름을 달래주지 못하고..
그러한 행동이 겉으로는 다르마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을 상사라(輪廻)의 고통에서 건져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한다면…
여러분이 행하는 어떤 수행도.. 그게 계율이든 공부든 수행이든..
이 생에서 세속의 풍요를 누리는 것마저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입니다..
다르마를 수행하는 목적이.. 명성이나 제자를 얻는 것이거나, 부를 얻는 것이라면..
그 수행은 삼악취(三惡趣)의 씨앗이 될 뿐..
성문(聲聞)의 해탈이나 보살(菩薩)의 깨달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다르마 수행이 아닌거죠...
인도의 대스승이신 바수반두(世親)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정한 계행(戒行)을 바탕으로..
듣고, 되새기고, 자신을 명상에 적용해보라..


이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은..진정한 다르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세속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모래가 물로 보이는 신기루처럼..목마름을 달래주지 못하고..
그러한 행동이 겉으로는 다르마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을 상사라(輪廻)의 고통에서 건져주지는 못합니다..

청정한 법수행이 되려면..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이 생에 대한 집착과 섞이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생은 너무나도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이상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이생은 아무런 본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조금이라도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법수행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해탈이나 깨달음을 운운하지는 않더라도..최소한 이생을 넘어서는 목표를가지고 수행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다음생의 이득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가르침의 첫 게송이.. 바르거나 바르지 못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간접적으로는.. 18가지 조건을 갖춘 귀한 인간의 몸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지체없이 다르마를 수행하는 정진의 중요성을 지적해줍니다..


존재의 세계(輪廻界)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

다음 게송에서..
존재의 세계(輪廻界)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라고 한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욕계,색계,무색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다르마 수행은 깨달음으로 안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첫 게송에서..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은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은 언젠가 끝날 거라는 것이지요..
그 때가 오면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생과 생을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부덕(不德)을 허용한다면.. 낮은 세계로 떨어질 것이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3악도(三惡道)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3선도(三善道)에 태어나기를 늘 기도하게 되죠…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덕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첫 게송은 소인(小人)의 길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길이기는 하지만...윤회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 목적은 그저 낮은 세계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계속해서 인간계,천신계 같은 높은 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두번째 게송은 커다란 고통으로 묘사되고 있는 세가지 낮은세계에서 뿐아니라..
세 가지 높은 세계에서 마저도 집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거기에는..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리심(出離心)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출리심이란.. 상사라(輪廻界) 전체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출리심을 일으키려면.. 상사라 전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상사라 전체가 고통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머무르고자 하는 생각도 들지 않고..머무를 장소도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호수가 꽁꽁 얼어버리면 백조가 머무를 곳이 없는 것과 같고..
숲이 타버리면 새가 앉을 곳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상사라 전체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온전히 윤회를 버리고 열반 얻으려는 바램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같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 찾는 해탈이 있는 곳을 중인(中人)의 길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이 두번째 가르침은 두가지 큰 주제를 설명합니다..
출리심을 일으키는.. 상사라(輪廻界)의 결점..
자신의 행동이  자기 스스로를 상사라에 가둔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과의 법칙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 게 아니다..

세번째 게송은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게송을 바탕으로..
존재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고통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이러한 존재의 경험에서 벗어나려는 바램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맘을 먹고서..
우리는 크고 작은 덕행을 쌓고.. 마침내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깨달음입니다..
이 두가지 유형의 해탈은.. 모든 거친고통과 그 원인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그러나..혼자만의 해탈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닙니다..
혼자만의 해탈은..윤회계에 비해서는 위대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선자량(善資糧)이 완전히 쌓인 것은 아닙니다..번뇌(煩惱)의 장애만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한 자는.. 아직 소지(所知)의 장애가 남아있습니다..
혼자만의 해탈의 경지에 있는 자의 선자량은..
아직 다 채워진 것이 아니기에..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없고,
자신의 목적에도.. 다른사람의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하는 것은.. 또한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고나서..오랫동안 그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집을 짓는다고 해봅시다..
집을 부수고나서.. 처음과는 다른방식으로 다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혼자만의 해탈은 완전한 깨달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계실 때였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5백명의 제자를 모아놓고 가르침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문을 시작하려는 순간..갑자기 만주스리(文殊菩薩)께서 나타나셨고..
아난다는 만주스리에게 대신 법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아난다가 법문을 하였더라면..
오백명의 제자가 모두 혼자만의 해탈에 들게 될 상황이었지만..
만주스리께서 법문을 하시는 바람에..
오백명의 제자는 모두 지옥에 갈 것만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난다는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오늘 만주스리께서 아주 나쁜 상황을 만드신 거 같습니다..
제가 법문을 하였더라면, 제자들이 모두 열반에 들었을 것인데..
만주스리님의 법문 때문에..모두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주스리가 한 게 옳다..
네가 가르침을 주었더라면 그들이 바로 열반에 들었을테지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무척 어려워졌을 것이고..아주 긴 시간이 걸리게 되었을 것이다..
만주스리의 법문에 감사하거라..
그들의 악업이 아주 빠르게 익어서.. 설령 지옥으로 떨어진다하여도..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되어..
그렇지않았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정등각(正等覺)에 보다 빨리 도달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자신만을 위해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가 구해야 할 목적은 일체중생의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그와같은 깨달음은..원인없이는 일어나지 않고..
불완전한 원인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인(因)과 연(緣)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겨울에 볍씨를 심는다면..바른 씨앗이 심겨졌다하더라도.. 벼는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밀씨를 뿌렸다면.. 벼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벼가 자라려면, 볍씨가 필요하고 적절한 온도와 습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른 인과 연이 모두 있어야만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데에도.. 바른 씨앗,바른 인(因), 필요한 모든 연(緣)들이 요구됩니다..
대비로자나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르고 참된 깨달음(正等覺)의 인(因)은 대자비(大慈悲)이다..
깨달음의 연(緣)은 보리심(菩提心)과 방편행(方便行)이다.”
근본인과 연을 지니고 방편을 행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성취하려면.. 자애,비민,보리심을 명상하고, 보살의 계율을 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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