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
네번째 게송..”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는
세번째 게송의 수행에 바탕을 둔 상대적 보리심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안팍의 현상을 실제로 여기면서 붙잡거나 파악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극단에 떨어집니다..
이러한 극단에 머무르고 있는한, 완전한 깨달음은 성취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상을 붙잡거나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극복하려면...
싸마타(缺定)와 위빠시야나(觀慧)를 수행해야 합니다..
(모든 상념을 쉬어,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것을 싸마타(缺定)라 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유하고, 명징하게 비추어 보는 것을 위빠시야나(觀慧)라 합니다..
보통.. 지(止)와 관(觀)이라고도 합니다..)
번뇌를 제거하는 실제적인 방편은 위빠시야나 수행에 있습니다..
하지만 위빠시야나를 수행하기 전에, 먼저 싸마타의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네번째 게송의 수행은.. 모두 합쳐서 세 단계로 나타납니다..
싸마타(缺定) 명상
위빠시야나(觀慧)명상
둘을 조화시키는 명상(止觀均行)
싸마타(缺定)
위빠시야나(觀慧)를 수행하기 전에, 싸마타(缺定)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에 마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념으로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와같이 분주한 마음으로는 적절하게 위빠시야나(觀慧)를 명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싸마타 명상을 하려면..
소위 명상의 가시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난 장소..
말하자면 수행을 방해하는 안팍의 장애가 없는 장소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드는 은둔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귀의, 보리심과 같은 예비수행(加行)으로 시작하십시오..
매 정근마다 평소에 하시던대로 하시면 됩니다..
할 수 있다면 금강좌로 앉아..
두 손은 선정인을 하고..
혀끝은 가볍게 입천정에 대고..
척추는 바로 세우고.. 눈은 반쯤 감으십시오…
이처럼 올바른 자세로 명상하십시오..
싸마타(缺定)를 수행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적 대상,내적 대상에 집중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보자에게는..외적 대상을 응시하는 것이 더 쉽고 적절합니다..
응시할 수 있는 많은 외적 대상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의 상입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응시함으로서.. 싸마타를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큰 공덕자량도 쌓게 됩니다..
부처님의 심상(心像)을 명상하게 된다면..
연꽃 좌대 위 달 방석에 앉아계시는 황금빛 석가모니 부처님을 관상합니다..
그의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으로 무릎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구족계를 받은 승려의 삼의를 걸치고 있고..금강좌(金剛座)로 앉아계시고,
두 발은 양편 무릎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불상을 바라보든 아니면 선명하게 관상을 하든..
일반적으로는 몸을 바라보고.. 특수하게는 양미간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흰색의 털이 나선형으로 꼬여있습니다…
이제는 불상, 혹은 심상의 다양한 색이나 모습을 바라보지 마시고…
마음과 눈, 호흡을 한데 모아..흔들림없이 그 미간에 집중하고 계십시오..
싸마타(缺定) 명상을 개발하는 동안에..수행을 방해하는 다섯가지 결점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이 다섯가지 결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여덟가지 처방이 있습니다..
명상을 도와주는 아홉가지 방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다섯가지 결점 중에서 가장 큰 것은..게으름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처방은..싸마타 명상이 주는 이득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 명상을 하면.. 물리적인 정신적인 평안함과 환희와 같은 세속적인 성취..
그리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진실한 믿음을 개발하도록 하십시오...
요지부동한 자세로.. 명상의 대상을 떠나지 않는다면..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몸을 구부리지도 않는다면..
첫번째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상념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게 됩니다..
사실상..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념은..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상시에 다른 행위로 바쁘다보니 알아차리질 못했던 것입니다..
앉아서 대상을 응시하고 있으면… 상념들이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상념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긍정적인 징조입니다..
그러니..실망하지 마세요…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을 계속하다보면.. 상념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 겁니다..
결국에는 수행의 올바른 조건과 자량이 쌓여..
어떤 사념도 일어나지 않고..한결같이 완전한 적정(寂靜)속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싸마타(缺定)의 성취입니다..
위빠시야나(觀慧)
싸마타(缺定) 명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번째 단계인 위빠시야나(觀慧) 수행을 위한 바탕일 뿐입니다..
위빠시야나 없이는 번뇌를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본수행은 위빠시야나..쁘라즈냐(般若)인 겁니다..
이것은 아주 예리한 논리적 지성을 이용하여..
외적인 현상과 내적인 현상의 궁극적인 실재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일체현상의 궁극적인 실재는 긍정과 부정..존재와 비존재의 두 극단을 떠나있습니다..
그러한 지견을 얻는 것이.. 위빠시야나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싸마타 명상과 결합함으로서.. 여러분은 한결같이 위빠시야나에 머무르게 됩니다.
위빠시야나(觀慧)는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외연(外緣)을 마음의 나타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환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모든 환영을 고유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외연(外緣)은 마음의 나타남이다..
첫번째 단계는 모든 외연(外緣)을 마음의 나타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이 보는 모든 사물, 매일 마주치는 광경이나 모습이 원인이 없다는 것..
외부적인 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그것은 모두 마음의 산물입니다..
무시이래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는 습관은 잠재적인 경향으로서 마음 속에 느낌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결과.. 적절한 조건들이 서로 만났을 때...이러한 습기가 자신의 주위에 현상을 투영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러한 사물의 창조자는 자신의 마음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꿈의 현상과 비슷합니다..
꿈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봅니다...
다양한 지역이나 동물, 그리고 어떤 다른 것들을 말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꿈도 꾸고.. 슬픈 꿈도 꾸고.. 악몽도 꿉니다..
이런 꿈들은 기쁨과 슬픔, 공포 따위들을 일으킵니다..
그렇더라도.. 외부의 대상은 아무것도 없죠…꿈은 그저 자신의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꿈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지금 이 순간처럼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도 꿈과 같은 것입니다..
꿈과 일상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꿈도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이고.. 지금 이순간도 여러분이 경험합니다..
꿈도 다양한 느낌을 일으키고.. 일상도 다양한 느낌을 일으킵니다..
유일한 차이는 시간의 길이입니다..꿈은 이생의 삶보다는 짧으니까요..
그것만 빼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물은..
실제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외부세계가 마음에서 분리되어있는 것이라면..
사물의 성질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똑같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게되죠..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은 환영이다..
외연으로 나타난 모든 대상이 마음이라고 여기고나서..
두 번째로는...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환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나 코끼리, 수레라는.. 마법사가 만든 다양한 환영체의 모습이 전혀 실제가 아닌 것처럼..
모든 현상의 다르마가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현상은 마법적인 환영과 같습니다..
마법사가 주문의 힘으로.. 특정의 원료들을 결합시켰을 때..
우리는 코끼리나 말과 같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다양한 외연들이 마법의 환영처럼 나타난다고 합니다..
원인들이 서로 합쳐질 때..무엇인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관찰해보면...아무것도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인(因)과 연(緣)에 의존하는 이상..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라면.. 외적인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인(因)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되면...그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겁니다..
모든 정신적인 현상이..마법사가 보여준는 환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고 생각해보세요…
연(緣)이 하나로 합쳐질 때.. 현상이 나타납니다..이 부분을 계속 명상해보세요…
모든 환영은 고유한 성품이 없다..
세번째 단계는 모든 환영은 고유한 성품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관찰해보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어떤 것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외연(外緣)이 그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외연으로 나타난 것은 내재된 성품이 없습니다...
모두 공성(空性)입니다..
공성이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성이란.. 실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단어일 뿐입니다..
그것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의 표현을 넘어서 있습니다..
실재는 투명하게 확장되어있는 것이자 비어있음입니다..
하지만 둘은 상반되지 않습니다..
현상과 공성이 상반된 것이 아니기에..둘이 아닙니다..
소리와 공성도 둘이 아닙니다..자각과 공성도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위빠시야나(觀慧)입니다…
싸마타(缺定)와 위빠시야나(觀慧)의 조화
싸마타(缺定)와 위빠시야나(觀慧)를 충분히 성숙시킨 뒤에…
세번째 단계로..둘을 하나로 녹여서 조화롭게 합니다…
이것 역시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첫단계는 외적인 모습(外緣)을 마음의 나타남으로 여기고..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환영으로 여기고..
모든 환영을 고유 성품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나서.. 공성을 자각하고 있고.. 표현을 넘어서있는 마음이..
시초부터 모든 극단을 넘어서 있는 실재와 융합되어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물이 물과 섞이는 것처럼.. 버터덩이가 녹아서 합쳐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자각을 직관하고...흔들림 없이 이 상태에 머무르십시오…
바람이 없는 등불처럼 말입니다..
바람이 없을 때.. 등불은 매우 안정적이고.. 고요하고.. 매우 선명하게 빛을 냅니다…
이러한 상태를 명상하십시오..
수행과 더불어.. 여러분은 점점 더 이 상태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아직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향한 자비심이 더욱 더 많이 올라 올 것입니다..
자비와 공성을 자각하는 지혜를 결합함으로서.. 보이는 모든 모습이 지혜로 변형될 것입니다..
마침내.. 3신을 수반하는 완전한 깨달음과 그침없는 불사가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네가지 집착에서 벗어남을 지적하는 내번째 게송..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에 대한 설명을 마칩니다..
공덕을 회향하기 위해...
먼저 이 명상을 통해 얻은 모든 공덕이..
자신이 과거에 모은 공덕..내가 지금 모으고 있는 공덕..
미래에 모을 공덕과 합쳐진다고 생각하십시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이므로..내가 아직 모으지 못한 공덕이라도 회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곳에 모은 다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덕있는 행위의 덕택으로..모든 중생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소서..”
공덕을 회향하고나서..
모든 현상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생각하십시오..
대보살이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회향하였듯이..자신의 공덕을 회향하고..
그들이 간 길을 따르겠다는 원을 세우십시오..
이것으로 네가지 집착에서 벗어는것에 관한 법문을 마칩니다…